대학 후배와의 악연

1985년 11월 14일 제2회 주요섭 문학상 시상식(수상자 소설가 최진우 박사)

2007.4월 군포에서 부동산중개업을 막 시작한 무렵이었다. 버스로 출근 중인 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10년 대학 후배인 김호진(가명)이었다. 선배님께 죄송하지만 500만원을 융통해 줄 수 없냐고 했다.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는 당연한 내 물음에 그는 입원한 어머니 병원비에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다급하거나 처지가 그래서겠지 정도로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내게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즉석에서 승낙하고 저녁때 만나기로 했다. 내 무른 성정이 문제였다. 누구에게 신세를 지면 언제든 조금이라도 갚아야 마음이 편하고 사람의 도리라는 신조로 살아 왔다. 당시 W은행 차장인 그에게 두 번 도움을 받았다. 하나는 내가 자비로 출간한 책을 여러 권 팔아 준 것이고 또 하나는 가계당좌 개설을 수월히 해 준 일이다. 요건은 되지만 가계수표 발행을 꺼리는 은행에선 여간해 해 주지 않으려고 한다. 은행 자동화기기 앞에서 후배와 만났다. 그는 연신 몸을 옹송거리며 미안한 말과 몸짓을 보였다. 정작 만나니 100만원을 늘려 달라고 했고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달랑 1주일 기한의 차용증 한 장만 받고 600만원을 송금해 줬다. 예금 잔액은 부족했으나 나는 신용대-이것이 훗날 똑같은 금액으로 사기당하는 온상이 되었으니 참 얄궂은 운명이다-1,000만원을 쓸 수 있어 가능했다. 다시 허리를 깊숙이 꺾은 그의 눈빛은 나를 특별한 은인 대하듯 했다. 약속한 날이 왔지만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 품었던 일말의 불안감이 현실화되었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더니 내가 그 꼴이 되었고 서로의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며칠에 한 번씩 연락해 변제를 재촉했다. 갈수록 내가 아쉬운 사람처럼 사정하고 애걸하는 형 편이 되었다. 그의 입에서는 항상 곧 갚겠다는 판에 박은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것은 번번이 공수표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다 두 달 뒤엔가 50만원을 내 통장으로 보내줬다. 자기를 믿 고 선뜻 꿔준 선배에게 최소한의 양심과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사람 심리가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일부라도 갚았다는 것은 나머지도 갚을 의사가 있는 것 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한다. 그를 저녁때 불러 밥을 사 주기까지 했다. 그때만 해도 시일이 좀 걸릴 따름이지 돈을 다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독촉하는 나보다 더 끈질기게 꼭 갚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그것을 이행치 않았다. 차용증에 공증을 받 을까 했으나 때를 놓쳤다는 생각에 주저주저했다. 마지막까지 그에 대한 실날같은 기대를 버 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과 확실한 사회적 지위를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 의 예금을 조사해 봤더니 1,000만원 쯤 있으나 예금담보대를 받았다고 했다. 승용차에 압류를 넣을까 했으나 귀찮기도 하고 실익이 없을 것이다 싶어 미루고 있었더니 어느새 본인이 처분 해 버렸다. 그런 경험이 없는 얼치기가 그저 벙어리 냉가슴 앓고 있는 격이었다. 상황을 유추해 봤다. 어머니 입원비란 구실부터가 거짓이었다. 사실대로 얘기해 봤자 빌려 줄 사람 없을 테니 한국인의 정서를 빌려 그런 이유를 댔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떨려나왔을 것이다. 절박한 처지에 자기가 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모두에게 거절당하다 내가 승낙하니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가 밝히진 않았 으나 내 지난날에 비추어보건대 주식을 하다 손해를 본 것이 틀림없었다. 가진 돈을 다 날리 고 대출금에 사채까지 있는데 그 중 급히 메꿔야 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다. 동은 달랐지만 직선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그러나 주거지의 근접성은 채권 회수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직장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 었기에 퇴근 이후 어떻게 해보지 않고는 도리가 없었다. 어느 일요일 나는 작심하고 그의 집을 쳐들어갔다. 예견한 듯 별로 놀라지도 않고 문을 열어 준 그는 공부시키던 딸을 옆방으로 보내고 나와 마주앉았다. 멀지 않아 명예 퇴직할 예정인데 퇴직금이 약 2억쯤 될 것이라 선배님 돈은 문제없이 정리해준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세금으로 갚아줄 수도 있다. 수도 없이 그의 식언에 기만당한 내가 담보를 내놓으라고 거칠게 몰아붙였을 때 돌아온 답변이었다. 그 때 그의 눈빛은 예전과 달리 흐리멍텅하고 어두웠는데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분통이 터질 일이 발생했다. 짚이는 게 있어 어느 날 낮에 그의 집에 가 봤더니 주인이 바 뀌어 있었다. 며칠 전 의왕시로 이사 갔다고 알려주는 말에 온몸의 맥이 다 빠져버렸다. 그 사실을 미리 들었음에도 눈앞에서 놓쳐버린 참담한 실패의 쓴맛이란! 그렇다고 이사일에 그와 맞닥뜨렸다고 과연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을까. 직장에 전화해 보니 후배는 벌써 퇴직했다 한다. 그때는 이미 그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는지 통화정지 중이라 했던지 그것조차 세월이 오래 흐른 지금 분간이 가지 않는다. 애초 몰랐고, 없었던 인간인 것처럼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내게 도움을 준 만큼 착하고 성실한 직장인으로 후배를 인식해 왔다. 하지만 이제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는 철저한 거짓말쟁이에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이었다. 돈을 당장 갚기 어 려우면 나와 대면해 솔직히 자신의 현 상황을 밝히고 내 이해를 구했어야 할 게 아닌가. 반드 시 갚겠다고 끊임없이 선배를 속이다 도망가 버리고 말다니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나는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겨우 종이 한 장 받고 마이너스 통장으로 돈을 빌려줬는데 내 순수한 호의와 도움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짓밟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문득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그것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있자니 부동산 일에 소홀하게 되고 동업자는 짜증을 내곤 했다. 돈보다 인간에의 믿음을 저버린 그의 악행을 향해 마냥 욕을 퍼부었다. 나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발걸음한 곳은 관할 경찰서였다. 그를 사기죄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처음부터 변제할 의사가 없음에도 나를 기망해 돈을 편취했다고 진술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억지 같았고 접수 받는 경찰관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고 고개 를 갸우뚱거렸다. 어쨌든 고소장을 제출한 나는 돈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후련했다. 내가 겪 은 불행을 너도 맛 좀 봐라는 복수의 심보였다. 집에서 알면 안 되기에 내 주소를 여동생 집 주소로 바꿔서 적었다. 그래서인지 그 후 경찰서 등으로부터 아무 통보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마음을 돌려 보기로 했다. 나와 그는 전생에 반대의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까. 내가 그에게 고통을 줬기에 현생에 와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서 작은 위로가 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2,3년쯤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마지막 의식을 치렀다.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된 차용증을 북북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기로 했다. 내게는 다른 할 일이 많았다. 아직 창창한 앞날에 그 따위가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나이 들면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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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여니 서늘한 기운이 불청객처럼 스며든다. 노을은 서서히 짙어지고 하루가 또 저물어가고 있다. 저만치 은행나무 하나가 낙엽을 하나 둘씩 떨구고 있다. 처연한 가을 저녁의 풍경을 바라보며 명상에 젖는다.

내 나이 어느덧 65세가 되었다. 아저씨보다 어르신 소리가 더 익숙하고 웬만한 젊은이에게 적당히 하대를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나이다. 때로는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100세 시대에 웬 청승맞은 소리냐는 타박을 들을 법하다. 하지만 병들고 노쇠해질 앞날을 내다본다면 살 만큼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삶의 색깔이 달라지고 그 무게감도 변한다. 대개는 전자는 밝은 색에서 어둡고 짙은 색으로, 후자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울고 나오는 것처럼 삶의 본질은 슬픔일까. 그 정의에 꼭 동의하지는 않지만 삶이 근본적으로 만만치 않은 거창한 존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0대의 학업, 20대의 사랑, 30대 이후의 직장 또는 사업에서 제가 원하는 대로 뜻을 이룬 경험이 얼마나 될까. 세상과 현실을 우습게보고 덤볐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적이 많지 않은가. 저마다 삶의 과정과 결과가 다르겠지만 나 또한 그랬다. 사랑에 몇 번 홍역을 앓았고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고 돈도 넉넉히 벌지 못했다. 태산같이 무거운 삶을 솜털처럼 여기고 안이하게 맞섰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하다 보니 이 나이였다.

나이가 드니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몸은 약해져도 정신의 키가 높아져 멀리까지 시야가 넓어졌다고나 할까. 마음의 여유가 생겨 매사에 서둘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가 늘어나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선의로 해석하는 자신을 보곤 한다. 남이 나를 미워하면 화가 나고 그에게 반감을 가졌지만 이제는 그럴 말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찾는다. 타인의 신산스런 삶에서 무언가 배우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 모두가 현인이다.

나이가 들면 한때 쌓아올린 지식이나 기술보다 긴 연륜에 녹아 흐른 지혜와 상식이 더 필요함을 느낀다. 세상은 진실의 힘으로 지탱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현실에선 그 진실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거짓이 더 편하고 유용할 때가 많다. 잘못되고 모순된 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음을 절감하곤 한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나이 들수록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느낀다. 가족간 애정을 줄기로 친구, 지인들과의 우정을 가지로 한 그 나무의 뿌리는 인간 사이의 따듯한 정(情)이다.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는 노년의 삶, 공허한 울림이 자리잡는 노년의 가슴을 채워 주는 것은 그러한 인간관계의 지속이다. 단 그 만남이 물질과 사욕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했으면 좋겠다. 요즘 내 일상의 발길이 자주 가고자 하는 곳은 자연이다. 콘크리트로 대변된 문명을 벗어나 흙과 물과 돌과 나무와 새가 있는 자연을 찾아간다. 맑은 공기, 소슬한 바람, 탁 트인 공간을 음미하며 인간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가만히 묵상해 본다.

긍정의 힘은 나이 들어서도 필요하다. 나이 먹고 늙어갈수록 나약해지고 체력이 떨어짐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다고 삶의 가치와 존엄이 추락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적으로 행동하면 세상은 내게 긍정으로 화답할 것이다. 아직은 이 세상에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더 많고 나쁜 사람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 더 있고 슬픔과 우울보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 많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의연히 맞서되 인생의 길목에서 숱한 고난과 시련과 마주칠 때 긍정의 사고와 행동은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한다. 비관과 부정의 사고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암담한 벽과 막다른 골목이라고 좌절하고 주저앉기보다 반드시 길이 있고 나는 할 수 있다고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냉정히 사고할 때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엄청난 천재지변이나 외부 요인이 아닌 인간세계의 문제는 정신력 하나에 달려 있다.

노인과 청년은 우리 인생과 사회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노년의 과거가 청춘이고 청춘의 미래가 노년이다. 남자와 여자가 상반된 존재지만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청년은 노년에게서 지혜와 경험을 배우고 노인은 청년으로부터 정열과 활력을 받아들여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조화하고 협력해야 할 공존의 관계이다. 청년과 노인은 시간이 앞뒤로 바뀐 것일 뿐 동전의 양면처럼 둘이 아닌 하나다. 일각에서 세대와 입장의 차이로 반목하고 멀리하는 양상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 장점을 보듬어주고 웃으며 대화하고 소통하는 장치와 제도를 만들면 무엇보다 삶이 즐겁고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다.

늙어 정신이 쇠약해지고 치매에 걸린 사람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똑똑하고 남에게 우월감을 갖고 남을 마냥 불신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피해 온 이들이 그렇다고 한다. 약을 써서 고치는 것보다는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사람을 굳이 가리지 않고 만나고 꾸준히 머리 회전을 시키는 취미생활을 가져야 한다.

사물을 멀리서 짐 내려놓기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도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도 없다. 부딪치는 환경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선악이 바뀌는 것이 아닐까.

금주는 금주

새해부터 술을 끊었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실천하면 늦지 않은 것이다. 과연 이 결정이 잘한 것인지 아닌지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굳건히 지켜나가려고 한다.

내가 술을 끊은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끊은 것이다. 일찌감치 술이 주는 매력과 이점에 빠져 좋아하고 가까이했건만 술 마시는 과정은 나를 곧잘 실망시키고 음주 뒤의 후유증은 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술은 대부분 쓰다. 일하거나 운동한 뒤의 한두 잔은 달기도 하지만 몇 잔을 거듭하다 보면 쓴맛이 오장육부를 휘젓는다. 인생 자체가 충분히 쓰고 매운데 심신을 달래줘야 할 술마저 그렇다는 것은 영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이 원래 쓰고 또 쓴 것이란 모진 교훈을 말하기 위함인가.

술은 기호물이자 식품이다. 우리 사회는 술이 매 끼의 밥과 김치처럼 필수 식품으로 여기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다. 다른 음료와의 선택의 여지를 숫제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분위기에 갇혀 있다. 성인이, 그것도 남자가 술을 제대로 못 마시면 좀 모자라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릴 때 술을 곁들이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자 미덕으로 알아 온 세월 속에 살았다.

나는 20대 한창 젊을 때 몇 달 피우던 담배를 특별한 이유 없이 딱 끊어버렸다. 그것은 내세울 게 없는 내가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술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잘못을 겪고서도 쉬 끊지를 못했다. 제 생일에 친구들을 불러 잔뜩 마신 뒤 집 화장실에서 졸도한 적이 있었다. 교우들과 어지러운 술판을 벌인 뒤 귀가하는 시장골목에서 아기 업은 여자와 부딪쳐 넘어뜨렸고 치료비로 큰돈을 물어낸 일도 있었다. 과음 뒤 사방에 토악질하고, 심사가 뒤틀려 남에게 손찌검하고, 취해 걷거나 차를 타고 가다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등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은 짓을 많이 저질렀다. 나이 들어 갈수록 조심하고 음주량이 줄면서 작은 실수조차 일어나지 않았지만 술은 대단한 미련처럼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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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쉽게 금주를 못하는 것일까. 저마다 이유가 다르겠지만 대개는 이렇지 않을까.

첫째, 습관이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한 번 길들여진 음주의 버릇이 일상화되어 주위의 술꾼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마시곤 한다. 술이 인간관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치지 못하고 그런 일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생은 알코올이라고 외치던 친구가 있었다. 대낮 반주 등 주야장청 마셔대다 통풍에 알코올성 치매까지 겹쳐 고생하고 있다. 학교에선 수재이고 직장에선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의 현주소가 안타까울 뿐이다. 고혈압을 비롯한 지병이 있어 술을 삼가라는 아내의 말을 무시해 온 어느 지인은 결국 뇌경색으로 쓰러져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경화와 위장병으로 술을 끊었던 또 다른 친구는 좀 나아지자 술 없는 인생이 재미없다고 술잔을 다시 입에 대었다.

둘째, 피하지 못할 타인의 시선 내지 자존심 때문이다. 남들 다 마시는 술을 혼자 못하면 대인관계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나이 먹어 약해졌어도 아직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라고 남들보다 먼저 끊는 것을 주저한다. 금주하면 약자이고 루저이고 폐인이 될 것이란 그릇된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술이 인간관계의 윤활유이자 촉진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끝까지 제 구실을 다할지에 대해선 강한 의문이 든다.

술은 얼마나 고맙고 다정한 벗이었던가. 한잔 마시면 알딸딸해지며 기분이 좋고, 두 잔 마시면 심신이 편안하고 황홀해지고 세 잔째 이르러선 괴로운 현실을 잠시 잊는 경지에 들어선다. 하지만 술 마시는 이들 중 중동무이로 끝내는 경우는 없다. 어떤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한국인의 잘난 국민성으로 우리 사회는 나날이 멍들어 가고 있다. 술은 과연 떨칠 수 없는 필요악일까.

확실히 술은 막혔던 수도관이 뚫리듯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을 도와주고 막힌 난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술로 말미암은 부작용과 폐해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누구나 알다시피 알코올은 뇌의 중추신경을 마비시켜 인간의 이성과 분별력을 빼앗는다. 평소에 온순하던 사람도 술만 들어가면 과격해지고 자제심을 잃고 남을 함부로 대한다. 술이 폭언, 폭력을 비롯해 숱한 사건 사고의 시발점이 되고 있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처음에 미소 짓는 천사가 한순간 악마의 친구로 돌변하는 것이 바로 술의 속성이다.

술자리에 가 보면 천태만상의 장면들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열심히 남에게 술 따라주고 자신은 한 모금도 안 마시는 주정 아닌 주정을 보았다. 남을 마구 헐뜯고 사생활을 들추는 등 뒷담화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취중 험담이 돌고 돌아 본인에게 전해져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다 결국 당사자끼리 화해한 일도 있었다. 큰소리치고 확신에 찬 호언장담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없을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럴듯한 취중 약속이 숫제 지켜지지 않음은 숱한 경험으로 체득했다. 취중의 지나친 언행으로 타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까지 입혔으나 술 깬 뒤 기억에 없고 모른다 하면 그뿐이다. 그것을 문제 삼으면 오히려 그쪽이 속 좁고 인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비친다. 술이 나쁜 줄 알면서도 사후에는 관대한 모순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음주문화가 나아지고 있지만 개선해야 할 점이 아직 많다. 상대방 입장을 돌보지 않고 강권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내 잔 비었으니 따라달라는 핀잔은 애교에 가깝다. 즉석에서 잔을 비우고 답잔을 강요할 때는 곤혹스럽다 못해 화가 나곤 한다. 술이 결코 남을 위해 마시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건배사로 ‘건강을 위하여!’라 외친 뒤 술잔을 거듭 부딪치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혀가 꼬부라지도록 마셔대는 모순을 되풀이한다. 술에 취해 지나친 몸짓-여자를 껴안으려 하거나 남에게 손발을 휘두르려고 하는 등의-이 나타날 때는 불안해 뛰쳐나가고 싶은 경우도 있었다. 정도가 심한 술자리일수록 이해관계가 얽히고 뒤가 개운치 못한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음주의 양과 회수에 비례해 우정과 친분의 척도로 삼는 빗나간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관계는 어두워지고 우리 사회는 병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일련의 미투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술 아닌 다과를 갖추고 각종 모임과 회식을 갖는 분위기가 확산된다고 한다. 조용히 담소하며 남에게 덕담하고 관심을 가져 줌으로써 정이 깊어지고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보편적인 술이란 도구가 유용하긴 하지만 즉흥적이고 정신을 취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면적인 속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이 들어 기력이 달리고 몸 이곳저곳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의 질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단주를 결심하게 된 데는

남들이 이해 못할 이유가 있다. 안온한 삶의 질서와 리듬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다. 치열하게 살지는 못할지언정 건실하게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에서다. 좀 더 반듯하고 정제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술에게 침범당하는 것이 건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짧기에 값진 시간의 누림, 심신의 그냥 편안함, 독서와 산행과 건전한 취미의 즐김 등 인생에 소중한 것들을 고스란히 지켜나가고 싶다. 술에 휘둘려 맥없이 살아서는 자유로운 내 인생은 없다.

해를 넘기기 전 친한 친구 하나가 병원에 입원했다. 술에 절어 사는 그는 망년회에서 과음한 뒤 정신을 잃고 길에서 넘어져 다친 것이었다. 깁스하고 누워 있는 그의 사진은 타산지석으로 나의 금주 의지를 더욱 다져주었다.

주위에서 내게 술을 자꾸 권한다면,

“금주(今週)는 금주(禁酒)야.”

1977년 대한민국 육군 사병 최기순 등 SMT1 IMG 20150930 0028

65세에 삶을 돌아보며

1960년대 후반 최태순, 조영저, 최혜순, 최기순 HDT1 1 (34)

나는 1954 갑오년 충청남도 대천(현 보령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교수이고 조부는 면장을 역임하셨고, 외조부 또한 대학교수인 집안이었다. 장남인 나의 밑으로 남녀 동생 하나씩 있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세상물정의 깨우침이 늦었다. 재학 중 혼인한 부모님 따라 2,3살에 서울 촌놈이 되었다. 평범한 꽁생원이자 서치(書癡)가 내 학창시절의 프로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야 성(性)의 뜻을 이해한 숫보기였다. 집안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궁핍하지도 않았다. 父의 외도와 방만에 흔들리는 가정을 어머니는 잘 꾸려나갔고 그것은 훗날 아들과 손자의 인생관에 영향을 끼쳤다.

1973년 나는 법대에 진학했다. 소시적부터 내게는 꿈과 목표가 없었다. 누구나 그럴듯한 미래의 청사진을 품고 사는 법인데 나는 작은 꿈이나 포부조차 없는 삶을 이끌어왔다. 어쩌면 지금도 목적지 없는 항해를 하고 있는 배가 아닌지 모른다. 법학과 고집은 아직까지 의문인데

아마 법관에의 희구보다는 엘리트연의 어리석은 우월의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막연한 이상과 명료한 현실과의 괴리에 빠진 20대의 청춘은 술과 유희로 젊음과 황금시간을 낭비했고 학업은 뒷전에 처박곤 했다. 변명 같지만 잔병치레로 어머니가 심어준 나약한 체질이란 인식에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긋고 열심히 노력하고 치열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2년 뒤 입대 영장이 나오자 미련 없이 군대에 들어갔고 인생의 첫 시련기를 맞았다. 3년간의 군 생활은 미래 인생의 예습이었고 군대는 작은 세상 무대였다.

사고 없이 무사히 제대하고 복학한 내게 질병의 고난이 찾아와 1년 휴학하기도 했다. 1981년 졸업했으나 초라한 성적표로 유수 기업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른 살에 은행에 입사해 16년간 고행기의 은행 생활을 시작했다. 숫자에 밝지 못하고 기업의 조직문화에 미숙한 늦깎이는 주인 없는 직장에서 어렵게 적응을 해 나갔다.

친척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직장의 조력자요 인생의 반려자로 맞이했다. 1984년 결혼해 딸과 아들을 차례로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듬해 아버지의 돌연사로 우리 가족의 울타리는 금이 갔으나 모두 잘 지탱해 나갔고 어머니는 시나브로 몸이 나빠지셨다. 보금자리로 잡은 경기도 과천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유산의 일부로 산 아파트는 재산의 큰 축을 이루어 우리는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89년 대리 승진의 기쁨을 맛보며 순탄한 화이트칼라의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짓궂은 운명의 시샘인가 IMF의 불똥이 내 발등에 떨어졌다. 1998년 국가 부도설과 회사 합병 등으로 국내가 어수선할 즈음 내게 권고사직의 연락이 왔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해 왔다고 생각했으나 나이 등이 발목을 잡았다. 평생직장이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직면한 나는 짧은 순간 퇴직을 결정했고 그 대가로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았다. 주위의 권으로 부동산중개업을 벌였는데 그것은 수난기였다. 동업으로 한동안 잘 나갔으나 권리금 구전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영업정지는 한때의 작은 일로 볼 수 있으나 사실 그 사건은 내 삶의 후반을 가름하는 분수령이었다. 수입이 없는 나는 주식의 고수익 정보에 솔깃해 겁 없이 집을 담보 잡은 대출금과 퇴직금을 맡겼다. 짭짤한 소득도 잠시, 9.11 테러의 된서리로 거액은 연기처럼 증발해 버렸다. 온실 속의 화초가 비바람 치는 들판에 내동댕이쳐진 것이었다. 집이 날아가진 않았으나 신주 같은 퇴직금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충격이 커 몇 년간 가족에게 그 사실을 숨겨 왔고 결국 밝혔을 땐 가장의 위상은 땅으로 추락했다. 안 어울리는 옷에 단추를 잘못 꿴 사업은 10년 만에 접었다.

우리 애들은 특별한 보살핌도 없었는데 둘 다 노력해 안정된 공무원의 길을 걷고 있다. 대리 만족을 갖게 하는 중년의 보람이요, 복락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들어 여전히 미숙아인 나는 두 번의 사기를 당했지만 훌훌 털고 일어났다. 2011 지역의 주차원을 내 생의 세 번째 직업으로 택했다. 예상 못한 육체노동은 내게 혹독한 고통을 안겼고 세상에 눈물 없는 빵이란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열악한 근무환경에 피로 누적, 몸살, 암 수술까지 치르며 오뚝이처럼 살아 온 게 벌써 만 7년이 되었다. 하지만 60대에 활동하고 용돈 버는 이 시기를 안정기로 삼는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고정 소득으로 찬찬히 노후 보장을 준비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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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우울하고 불운하고 시행착오와 아쉬움도 많았던 지난 세월이었다. 그러나 양심 바르고 진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치열한 모습은 없었고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을 외면했다. 사람보다 금전을 앞세우지 않았고 남을 더 위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썼다. 건강, 명예, 문화를 물질과 문명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매김했다. 산에 열심히 다니고 바둑을 즐기고 책을 읽으며 정신을 일구는 인생이면 성공이 아닐까. 각종 모임과 일터와 사회생활에서 친구와 지인들과 만나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는 것은 쏠쏠한 재미요, 인생의 낙이다. 요즈음은 여행의 빈도가 늘고 있다. 미지의 세계와 만나고 견문을 넓히는 일은 실은 나 자신을 재발견하는 소중한 기회다. 두 다리가 튼튼하고 아직 가슴이 뜨거울 때 여행을 자주 다녀야겠다는 마음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I hereby affirm that I am Choi Ki-sun, the father of Choi Kwang-mo, the owner of the copyright of the texts in this web page, and have legal authority in my capacity to release the copyright of those works. I agree to publish the above-mentioned content under the Creative Commons CC0 1.0 Universal Public Domain Dedication. In no way are the patent or trademark rights of any person affected by CC0, nor are the rights that other persons may have in the work or in how the work is used, such as publicity or privacy rights. Unless expressly stated otherwise, I make no warranties about the work, and disclaims liability for all uses of the work, to the fullest extent permitted by applicable law. When using or citing the work, you should not imply endorsement by me or the affirmer.

과천에 살어리랏다

과천에 살어리랏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남태령에 오른다.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면 문득 잔잔한 희열을 느낀다. 지하철을 타고 과천역의 지상의 올라설 때도 마찬가지다. 달콤하고 청량한 공기를 마시곤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린다.

부모님이 신혼의 보금자리로 정해 주신 과천에 1984년부터 살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곳이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과천은 내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뿌리칠 수 없는 운명처럼 그것은 줄곧 내 인생을 지배하는 커다란 존재로 자리매김되었다.

35㎢의 면적에 인구 약 6만의 과천은 경기도의 작은 도시다. 대부분이 그린벨트로 묶여 있고 아파트 주거형태가 대다수라 전원도시이면서 베드 시티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도시도 농촌도 아닌 어정쩡한 곳이면서 양쪽의 장점을 고루 갖춘 곳이 바로 과천이다.

지난 30여 년간 과천은 많이 변했다. 시 승격과 함께 서울 전화로 편입되었고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었으며 강남 못잖은 부동산 광풍이 불어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러나 정부청사가 세종시로 이전함에 따라 지역 경제가 침체되었다. 최근 재건축의 호재로 부동산 시세가 다시 상승일로에 있다. 동시다발로 이뤄진 재건축의 진행으로 시 곳곳에 도시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건물 잔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사위는 어두운데 불빛 한 줄기 없는 폐허는 흡사 폭격 맞은 마을을 연상케 했다. 새롭게 단장될 아파트를 맞기 위한 통과의례이겠지만 그 순간만은 내 살을 도려낸 듯 가슴이 저려 왔다.

극장, 예식장, 숙박업소, 건축 중인 병원 등이 사라진 이후 과천은 문화, 복지 시설의 미비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하지만 녹지가 많고 도로가 잘 정비되었으며 시민의식이 성숙한 과천은 여전히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쾌적하고 안전한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과천에 한번 정착하면 떠나기 싫고 떠난 사람들은 다시 오고 싶어 한다. 과천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 또한 오래도록 있고 싶어 할 만큼 근무여건이 편하고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혼 주거지의 영순위로 꼽히는 곳이 바로 과천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뒤 재산을 정리하고 아들 따라 과천으로 이사 오셨다. 처제들도 셋이나 언니 뒤를 따라 과천으로 옮겨와 다들 크게 만족하며 살고 있다.

다른 여러 지역에 살아 보지 않고 또 과천을 속속들이 모르면서 과천이 가장 낫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 과천을 기리고 사랑하는 데는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되고 더 이상의 비교는 부질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과천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천을 둘러싼 자연환경이다. 과천같이 작은 도시에 큰 산을 둘씩이나 끼고 있음은 천혜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물질만으로 살 수 없듯이 도시 또한 문명만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가 없다. 과천의 주변 환경은 보이지 않지만 과천에 결핍된 것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선사해 준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우뚝 솟은 산의 기상, 그리고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나무, 지저귀는 새들로부터 약동하는 생명력을 배운다. 관악산과 청계산은 과천의 젖줄이자 과천을 영원히 지켜 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다.

과천에 처음 살았던 곳은 13평 아파트였다. 7.5평 아파트는 짝수라고 석유 보일러인데 우리 집은 연탄을 난방으로 썼다. 추운 겨울날 한밤에 깨어나 그것을 갈 때 나는 독한 냄새에 숨이 막히곤 했었다. 두 애를 낳고 키우며 소담한 미래를 꿈꾸었다. 아들놈이 슈퍼맨 흉내로 놀이터 기구에서 뛰어내려 팔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증손자를 돌봐 주시던 외할머니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일은 내내 안타깝고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은 남들이 이해 못할 삶의 전환을 꾀했다. 수십 년 살아온 아파트를 팔고 단독 주택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청계산 아래 구옥을 헐고 새 집을 짓고 있는 중이다. 큰돈과 노력이 들어가는 벅찬 일이지만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진정한 삶의 질과 가치가 무엇인지 자문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작고 아담한 정원을 꾸미고 이웃과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어 개방하려고 한다. 가까운 산으로 매일 산책 나가 자연과 더불어 영혼을 살찌우는 대화를 나눌 것이다.

과천을 돌아보며 부딪치는 사물들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초라한 길섶의 풀 한 포기부터 잘 짜여진 도심 거리의 빌딩들, 숲속과 양재천에 뛰노는 수많은 동물들까지 모두 정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과천에 오래오래 살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과천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신선한 감동과 매력은 삶의 활력소로 바뀌었고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어 주었으며 앞날의 꿈과 행복을 꾸려나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5월의 햇살이 오늘따라 눈부시다. 그것은 맑고 깨끗한 과천의 하늘을 가득 비춰 주고 있다.

과천을 2행시로 푼다면

과천은

과연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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